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 1,000억 원의 수영장 그림 속에 숨겨진 이별의 아픔

천억 원의 물결 속에 가라앉은 찬란하고도 슬픈 연가

눈부시도록 푸른 수영장, 일렁이는 물결 위로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따스한 햇살. 
그 찬란하고 청량한 풍경 앞에 서면, 누구라도 당장 저 투명한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입니다. 
물의 표면은 하얗고 노란빛으로 반짝이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호크니의 1972년 작 '예술가의 초상(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이 품고 있는 진짜 이야기는 그 표면의 쾌적한 온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2018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000억 원(9,030만 달러)이라는, 당시 생존 작가 최고 낙찰가를 기록하며 제프 쿤스의 '벌룬 독(오렌지)'이 세웠던 기록을 단숨에 갈아치운 이 거대한 캔버스는, 사실 한 남자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시각화한 참혹하고도 아름다운 이별의 기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수영장 그림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뒤에는, 닿을 수 없는 연인을 향한 예술가의 피 끓는 그리움이 묻혀 있습니다.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가 넘는 이 거대한 화폭은 화려한 색채와 평면적인 팝아트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공간을 찬찬히 뜯어보면 지독한 상실감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간을 해석하는 호크니의 시선은 너무도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한없이 감성적입니다. 
무성한 녹음이 우거진 산맥을 병풍처럼 두른 고요한 수영장은 외부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된, 그들만의 은밀한 낙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낙원은 이미 무너져 내린 뒤의 풍경입니다. 
붉은 기운이 도는 분홍빛 재킷을 입은 남자는 수영장 가장자리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수면을 굽어보며 서 있고, 물속의 남자는 투명한 물결에 의해 형체가 일그러진 채로 잠영하며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이미 영원히 어긋나버린 두 사람의 거리가,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수영장을 세상에서 가장 처연하고 슬픈 공간으로 탈바꿈시킵니다.




눈부신 태양 아래 피어난 사랑, 그리고 잔인한 균열



이 서글픈 서사의 시작은 1966년 눈부신 태양이 내리쬐는 로스앤젤레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UCLA에서 여름 학기를 가르치던 20대의 젊은 강사 호크니는 18세의 눈부신 미술학도 피터 슐레진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우중충하고 억압적인 영국 요크셔 출신의 호크니에게, 황금빛 햇살을 머금은 듯한 미국 소년 피터는 자유로운 캘리포니아의 태양 그 자체이자 완벽한 뮤즈였습니다. 

두 사람은 곧장 사랑에 빠졌고, 피터는 호크니의 캔버스 위에서 영원한 젊음을 부여받으며 수많은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완벽히 보장되는 캘리포니아의 프라이빗 수영장들은 그들의 동성애적 사랑이 가장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도피처이자 밀어의 공간이었고, 호크니는 이 공간을 배경으로 빛과 물의 움직임을 탐구하는 데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청춘의 열병처럼 뜨거웠던 사랑에도 서서히 차가운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 차이에서 오는 가치관의 충돌, 호크니의 지나친 집착과 예술가적 예민함, 그리고 피터의 독립에 대한 갈망이 뒤엉키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1971년 스페인 카다케스 여행을 기점으로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의 전부와도 같았던 뮤즈를 잃은 고통은 호크니를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붓을 쥐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시기, 지독한 우울증과 깊은 상실감의 수렁 속에서 이 작품의 기이하고도 우연한 씨앗이 싹트게 됩니다.







스튜디오 바닥에 떨어진 두 장의 사진, 운명적인 구도의 탄생



어느 날, 참담한 심정으로 런던 스튜디오의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호크니의 시선이 우연히 겹쳐진 두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에 가닿았습니다. 

한 장은 1966년 캘리포니아에서 찍은, 물속을 잠영하는 사람의 왜곡된 형상이었고, 다른 한 장은 땅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이었습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포개진 이 이질적인 두 피사체는 서로 다른 차원, 혹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두 사람의 단절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호크니는 훗날 '전혀 다른 스타일과 맥락을 가진 두 인물을 한 화폭에 그린다는 아이디어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당장 캔버스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예술적 영감으로 마취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찢어진 가슴을 안고 캔버스를 마주하는 것은 제 살을 깎아내는 형벌과도 같았습니다. 
1971년 말부터 그는 무려 수개월 동안 이 구도에 매달려 캔버스를 수없이 수정하고 덧칠하며 집착에 가까운 몰두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그림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결국 극도의 좌절감에 휩싸인 그는 완성하지 못한 화폭을 자신의 손으로 무참히 부수고 폐기해버리고 맙니다. 
떠나간 연인을 현실에서 붙잡지 못했다는 절망감과, 완벽한 구도를 화면에 구현해내지 못했다는 예술가로서의 패배감이 뒤섞인 몹시도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시공간을 기워 만든 이별의 무대, 그리고 18시간의 사투



이 위대한 그림은 그렇게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기억 속으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1972년 5월, 뉴욕의 앙드레 에머리히 갤러리에서의 중요한 전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호크니는 다시금 용기를 내어 산산조각 났던 아이디어를 주워 담습니다. 

오직 이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열망 하나로, 그는 무작정 펜탁스 카메라를 챙겨 남프랑스 생트로페에 위치한 영화감독 토니 리처드슨의 별장 '르 니 뒤 뒤크(Le Nid du Duc)'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습니다. 

지중해의 찬란한 태양광이 내리쬐는 그곳의 완벽한 수영장을 무대로 삼아, 조수 모 맥더모트와 친구를 모델로 세운 뒤 자신이 상상했던 최초의 구도대로 수백 장의 사진을 미친 듯이 찍어댔습니다. 


런던의 작업실로 돌아온 호크니의 작업 방식은 그야말로 기행에 가까운 집념의 산물입니다. 

남프랑스에서 찍어온 수영장 사진들을 작업실 벽에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 그림의 뼈대가 될 배경을 만들고, 

그 위에 런던 켄징턴 공원에서 분홍색 재킷을 입고 포즈를 취했던 전 연인 피터 슐레진저의 사진을 교묘하게 합성해 자신만의 완벽하고도 슬픈 가상의 무대를 조립해낸 것입니다. 

남프랑스의 찬란한 태양광과 런던 공원의 차분한 빛, 낯선 타인의 육체와 사무치게 그리운 연인의 이미지가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하여 캔버스라는 하나의 우주 안에서 꿰매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18시간씩, 작업실에 틀어박혀 끼니조차 거른 채 미친 사람처럼 물감과 사투를 벌였습니다. 

피터에 대한 사랑과 원망을 안료에 섞어 칠하듯 치열했던 그 과정은 뉴욕으로 그림을 실어 나를 운송업자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밤에야 기적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수면을 경계로 나뉜 두 세계, 관찰자와 유영하는 자

이제 완성된 작품의 수면 아래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볼까요. 
단정한 분홍색 재킷을 입은 피터는 수영장 밖 가장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물속에는 하얀 수영복을 입은 남자가 평영을 하며 그를 향해, 혹은 그를 무심하게 지나쳐 헤엄치고 있습니다. 
훗날 미술계와 대중은 이 물속의 남자를 피터의 새로운 연인이었던 에릭 보만으로 추측하며 극적인 해석을 더했습니다. 
비록 피터 본인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이 그저 호크니가 평소 매료되어 있던 '수영장'과 '이중 초상화'라는 두 가지 모티프가 결합된 개념적인 문제 해결의 결과물일 뿐, 감정적인 이별 그림이 아니다라며 세간의 과도한 해석을 쿨하게 일축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는 결코 누군가의 뮤즈가 아니었다며 독립된 예술가로서 선을 그었죠. 

하지만 이 창백하리만치 아름다운 그림을 마주하는 우리는 예술가의 붓끝을 타고 흘러나온 무의식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처연함과 고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수영장의 물은 투명하여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완벽하고도 잔인한 단절의 벽입니다. 
피터는 옷을 겹겹이 껴입고 '물 밖'이라는 건조하고 안정적인 현실 세계에 머물러 있는 반면, 물속의 남자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물의 굴절 속에서 형체가 일그러진 채 부유하고 있습니다. 
수면에 닿은 호크니의 아크릴 붓 터치는 팝아트 특유의 하얗고 노랗고 붉은 꼬불꼬불한 선들로 일렁이는 물의 표면을 기가 막히게 잡아냈지만, 
그 눈부신 기교의 심연에는 안전한 물 밖에서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는 전 연인을 영원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뼈아픈 무력감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들의 처절한 이별 과정을 담은 1974년 다큐멘터리 영화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의 몽환적이고 우울한 색채처럼, 이 그림은 거짓말처럼 화창하고 찬란하기에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슬픔의 웅덩이, 상실을 예술로 승화하다


이 작품이 1,000억 원이라는 경이로운 가치를 인정받으며 예술 시장의 정점에 선 것은, 단지 당대 최고의 팝아트 화가가 이뤄낸 시각적 혁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매끄러운 캔버스 표면 아래에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애도, 그리고 한 시절의 찬란했던 청춘이 돌이킬 수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 것에 대한 짙은 아쉬움이 고여 있기 때문입니다. 

호크니는 자신이 도저히 맨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이별의 통증을 캔버스 위에서 치열하게 분해하고 조립함으로써, 세상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슬픔과 아름다움의 웅덩이를 만들어냈습니다. 

고통은 찰나였지만, 예술은 영원으로 남았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을 할퀴고 지나가는 뼈아픈 상실과 이별들도 호크니의 수영장과 같을지 모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의 한복판에 홀로 남겨졌을 때는 그저 숨이 막히는 캄캄한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가라앉는 것 같겠지만, 피하지 않고 그 감정들을 마주하며 고스란히 겪어내는 지난한 과정은 결국 우리의 삶을 더 깊고 다채로운 색채로 물들여줍니다. 

나를 떠나간 인연을 향한 슬픔이나 미련조차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예술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다면, 그 아픔은 언젠가 당신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위에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명작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지독한 상실감에 빠져 화폭을 부수던 호크니가 끝내 치열했던 18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걸작을 탄생시켰듯,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상실의 아픔도 언젠가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머금고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는 투명한 물결로 눈부시게 승화되기를 다정하게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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