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에서 건져낸 '망친 그림'의 반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이 19세기 말,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매미 소리가 요란하고, 소나무 향이 코끝을 찌릅니다. 그런데 길가 덤불 속에 캔버스 하나가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습니다. 
물감은 아직 덜 마랐고, 구도는 어딘가 기묘하게 비틀려 있습니다. 
누군가 그리다 만, 혹은 홧김에 내던진 '쓰레기'처럼 보입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발로 툭 차고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 캔버스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면, 당신의 후손은 지금쯤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 겁니다. 
그 '쓰레기'의 주인은 바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 폴 세잔(Paul Cézanne)이었으니까요.





괴팍한 은둔자의 '버리기' 취미

세잔은 미술사에서 가장 지독하고 까탈스러운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세상의 '본질'을 캔버스에 구현해내지 못했다고 느끼면, 그 즉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은 가차 없이 창문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정원을 걷다가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나무 위에 걸어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죠. 

그의 아들 폴은 아버지가 버린 그림들을 몰래 주워오기 바빴고, 
심지어 동네 주민들은 숲에서 주운 캔버스를 땔감으로 쓰거나 낡은 창문을 막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세잔에게 그림이란 '완성' 아니면 '파기'라는 극단적인 이분법만이 존재했습니다.





전설적인 아트 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가 세잔의 흔적을 찾아 프로방스로 내려왔을 때,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세잔이 '망쳤다'며 내다 버린 그림들이 농부의 집 헛간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볼라르는 이 '버려진 자식들'을 헐값에, 혹은 거의 공짜로 쓸어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훗날 입체파(Cubism)의 기원이 되었고, 피카소와 마티스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 부르며 경배하는 성상(이콘)이 되었습니다.


115번의 모델, 그리고 버려진 초상화

세잔의 완벽주의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딜러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릴 때였죠. 
세잔은 볼라르를 의자에 앉혀두고 무려 115번이나 모델을 서게 했습니다. 
볼라르는 움직이다가 혼이 날까 봐 조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고, 사과처럼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그 기나긴 고문 끝에 세잔은 붓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셔츠 앞섶이 그나마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손을 망쳤어. 다시 해야 해!"





결국 그 초상화는 미완성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세잔의 기준에서 '완성'이란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미술 시장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세잔의 작품 중 상당수는 그가 '실패'라고 여겼던 흔적들입니다. 
캔버스 곳곳에 칠하다 만 빈 공간(non-finito)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들은, 
오히려 그가 세상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파악하려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왜 그는 그토록 자신을 학대했을까?


세잔이 그토록 괴로워했던 이유는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껍데기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영원한 구조를 잡고 싶어 했습니다. 
자연을 원통, 구, 원뿔로 환원하여 해석하려는 그의 시도는 당시로서는 미친 짓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사과 하나를 그리기 위해 사과가 썩어서 뭉그러질 때까지 쳐다보았습니다. 
그의 눈은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대상을 엑스레이처럼 꿰뚫는 분석 도구였습니다. 
그러니 붓질 하나하나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그에게 그림을 버리는 행위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현대 미술은 바로 이 '실패의 틈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세잔이 남긴 거친 붓터치, 왜곡된 원근법, 칠하다 만 빈 캔버스는 
후대 화가들에게 "아, 그림은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다시 구축하는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가 숲속에 버린 것은 '망친 그림'이 아니라, 미래의 미술을 위한 '보물지도'였던 셈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삭제' 버튼과 세잔의 숲

오늘날 우리는 세잔보다 훨씬 쉽게 '버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셀카는 1초 만에 휴지통으로 직행합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릴 사진 한 장을 위해 수십 장을 찍고 나머지는 디지털 숲속으로 던져버립니다. 
우리는 결과물(Output)의 완벽함에 집착하느라 과정(Process)의 가치를 잊곤 합니다. 

하지만 세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교훈을 줍니다. 
그가 실패라고 여겼던 것들이 오늘날 수천억 원의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그 안에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매끄럽게 보정된 결과물보다, 땀 냄새 나는 미완성의 시도가 때로는 더 큰 울림을 줍니다.




만약 세잔이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아이패드를 부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 부서진 아이패드 조각조차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당신이 지금 무언가를 만들다 실패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다면, 잠시 멈추십시오. 
어쩌면 그것은 망친 것이 아니라, 아직 시대를 만나지 못한 걸작의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세잔이 숲속에 던진 그 캔버스들처럼 말이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치열함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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