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덮어버린 붉은 선언,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

어떤 색채는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그리고 마침내 영혼의 진동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의 공간은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나요? 
혹은, 당신의 내면은 어떤 색조를 띠고 있나요? 
오늘 우리는 미술사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뜨거우며, 동시에 가장 고요한 '붉은 방'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바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1911년작, <레드 스튜디오(The Red Studio, L'Atelier Rouge)>입니다.





우연과 필연 사이, 붉은색의 침범 

처음부터 이 그림이 붉은색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엑스레이 분석과 미술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티스의 캔버스 밑바닥에는 원래 평범한 청회색과 옅은 핑크빛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1911년, 파리 근교 이시레물리노(Issy-les-Moulineaux)에 마련한 그의 작업실은 실제로 흰 벽과 평범한 바닥을 가진 현실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티스는 붓을 든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충동 혹은 필연적인 계시를 마주합니다. 
그는 눈앞의 '사실'을 지워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베네치안 레드(Venetian Red)라는 강렬하고 깊은 붉은색으로 캔버스를 덮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바닥과 벽의 경계가 사라지고, 천장의 깊이감이 사라집니다. 
오직 붉은색만이 캔버스를 점령하며,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압착시킵니다. 

이것은 단순한 채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언'이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각의 공간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거장의 독백이었죠.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마티스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곧 그 공간의 진짜 색깔이라고 말이죠.



부재(不在)로서 존재하는 사물들 

이 붉은 바다 위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가구들이 묘사된 방식입니다. 
의자, 서랍장, 탁자, 괘종시계... 이 사물들은 색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티스는 붉은 물감을 칠하다가 가구가 있는 자리를 비워두거나, 
혹은 칠해진 붉은색 위를 긁어내어 캔버스 밑바닥의 색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옅은 노란색 선으로 간신히 윤곽만 잡힌 이 가구들은 마치 유령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마티스의 철학은 절정에 달합니다. 
작업실의 주인공은 '가구'가 아닙니다. 
그에게 가구는 그저 그곳에 존재했다는 흔적일 뿐,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예술적 에너지와 작품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네거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저는 이를 '겸허한 물러섬'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덜 중요한 것들은 색을 잃고 투명해져야 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위해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마티스의 붉은 방은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정확함이 곧 진실은 아니다. (Exactitude is not truth.) - 앙리 마티스"






시간이 멈춘 시계, 그리고 영원한 현재 


그림 중앙에 위치한 괘종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시계에는 바늘이 없습니다. 

시침도 분침도 없는 시계. 이것은 명백한 의도입니다. 

예술가의 스튜디오 안에서 물리적인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창작의 몰입 속에서 1분은 영원처럼 늘어나기도 하고, 10년은 찰나처럼 스쳐 가기도 합니다. 


마티스는 이 공간을 '시간이 정지된 성소'로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세상 밖의 시끄러운 소음과 재촉하는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차단된, 오로지 색채와 형태만이 춤추는 공간. 

바늘 없는 시계는 우리에게 묘한 위로를 건넵니다. 

"서두르지 마라. 너만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타인의 속도에 맞춰 숨 가쁘게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멈춘 시계는 붉은색만큼이나 강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림 속의 그림: 자아를 마주하는 갤러리 


유령 같은 가구들과 달리, 벽에 걸린 그림들과 바닥에 놓인 도자기는 생생한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젊은 선원 II>, <호사 I> 등 실제 마티스의 작품들이 이 붉은 방 안에 미니어처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붉은색이 현실 공간을 지배한다면, 그 안의 작품들은 또 다른 현실, 즉 '예술적 진실'을 대변합니다. 


마티스는 자신의 작업실을 그리면서, 자신의 과거 작품들을 다시 한번 캔버스에 불러들였습니다. 

이는 일종의 회고전이자, 자기 확신에 대한 다짐입니다. 

가구는 투명해져도, 그가 창조한 예술만큼은 선명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배경으로 사라져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당신만의 '작품'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커리어, 당신의 사랑, 혹은 당신이 지켜온 신념일 수도 있겠지요. 




거절당한 걸작이 전하는 위로 


놀랍게도 이 걸작은 처음 완성되었을 때, 주문자였던 러시아의 수집가 세르게이 슈킨(Sergei Shchukin)에게 거절당했습니다. 

당시의 시각으로도 이토록 과감한 붉은색의 평면성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봅니다. 

심지어 1949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되기 전까지, 이 그림은 런던의 나이트클럽 장식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티스는 알았을까요? 

훗날 마크 로스코(Mark Rothko)와 같은 추상표현주의 거장들이 이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영감을 얻게 될 것임을. 

로스코는 "이 그림을 보고 나서야 나는 색 그 자체만으로 감정을 표현할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진심이, 당신의 열정이 지금 당장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세요. 

마티스의 붉은 방이 그랬듯, 진정성 있는 색채는 언젠가 누군가의 영혼을 뒤흔들고,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됩니다.

거절은 때로 위대한 여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당신만의 '레드 스튜디오'를 찾아서 


오늘 우리는 마티스의 붉은 방을 거닐며, 공간을 넘어선 감정의 파동을 느꼈습니다. 

<레드 스튜디오>는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회색빛 도시의 논리에 지쳐갈 때, 마음속 붓을 들어 당신만의 붉은색을 칠해보세요.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가구)은 과감히 윤곽선만 남기고 비워두세요. 

그리고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 당신이 창조한 가치들(그림들)에는 가장 선명한 색을 입히세요. 

바늘 없는 시계를 걸어두고, 오직 당신의 호흡에 맞춰 흐르는 시간을 즐기세요. 


공간은 물리적인 벽이 아니라,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오늘 밤, 눈을 감고 당신만의 스튜디오를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은 어떤 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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