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빛을 그린 화가의 일생
바다가 키운 소년 

1840년 11월 14일, 파리의 한 골목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훗날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오스카르 클로드 모네였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감수성이 진정으로 깨어난 곳은 파리가 아니었다. 다섯 살이 되던 해, 가족이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르아브르로 이주하면서 모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르아브르의 바다는 어린 모네에게 첫 번째 화폭이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하늘의 색, 파도가 만들어내는 빛의 유희,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의 실루엣. 이 모든 것이 소년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학교 수업은 지루했지만, 수업 중에 선생님과 친구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일만큼은 즐거웠다. 열다섯 살 무렵, 그의 캐리커처는 지역에서 제법 알려졌고, 그림 한 점당 20프랑이라는 꽤 괜찮은 값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네의 운명을 바꾼 것은 캐리커처가 아니었다. 1856년, 화구상에 자신의 캐리커처를 걸어두었던 모네는 그곳에서 외젠 부댕이라는 풍경화가를 만났다. 부댕은 이미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그리는 "플랑 에르"(plein air) 기법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자연을 직접 보고 그려야 합니다. 실외에서 그림을 그리세요"라는 부댕의 조언은 모네에게 계시와도 같았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캐리커처로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힘든 풍경화를 그려야 할까? 하지만 부댕과 함께 해변으로 나가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순간, 모네는 자신이 평생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베일이 찢어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회화가 무엇인지 이해했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파리에서의 고군분투 

1859년, 열아홉 살의 모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향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당시 화가가 되기 위한 정석 코스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역사화나 신화화를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네는 그런 아카데믹한 접근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대신 그는 아카데미 쉬스에서 공부하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 예술가들을 만났다.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귀스타브 쿠르베 같은 이들과의 만남은 모네의 예술 세계를 확장시켰다. 특히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모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인 주제가 아닌 일상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다.

하지만 1861년, 예술에 몰두하던 모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징집 통지서였다. 알제리로 군 복무를 떠난 모네는 그곳에서도 북아프리카의 강렬한 빛과 색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장티푸스에 걸려 1년 만에 제대하게 되었고, 이모가 나머지 복무 기간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돈을 대주었다. 조건은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1862년, 모네는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들이 이어졌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릭 바지유. 이들은 곧 친구이자 동지가 되었고, 함께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숲으로 나가 야외 스케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글레르의 아틀리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기법을 강조했다. 모네와 친구들은 점점 더 자신들만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카미유, 그리고 새로운 시작

1865년은 모네에게 중요한 해였다. 그는 처음으로 살롱전에 두 점의 해경화를 출품했고, 놀랍게도 두 작품 모두 입선했다. 비평가들은 이 신진 화가를 주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그해 모네는 카미유 동시외라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카미유는 모델로 일하고 있었고, 모네는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뮤즈가 되었다. 모네의 가장 유명한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초록 드레스의 여인'의 주인공이 바로 카미유였다. 이 작품은 1866년 살롱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사랑과 예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재정 상태는 늘 불안정했다. 1867년, 카미유가 첫 아들 장을 임신했을 때 모네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카미유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경제적 지원을 끊었다. 모네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며 간신히 버텼다. 절망적인 순간에는 센 강에 몸을 던지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럼에도 모네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1869년, 그는 르누아르와 함께 센 강변의 라 그르누예르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서 작업한 연작들은 인상주의의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빠른 붓놀림, 순수한 색채, 빛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시도.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들은 '미완성'이었다. 하지만 모네에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순간의 인상을 담아내고자 했다. 

1870년 6월, 모네는 마침내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징집을 피해 모네는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피신했다. 이 시기 런던에서 모네는 터너와 컨스터블의 작품을 접했다. 특히 터너의 대기 효과와 빛의 표현은 모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런던에서 모네는 화상 폴 뒤랑 뤼엘을 만났다. 이 만남은 모네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뒤랑 뤼엘은 모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비록 큰돈은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긴 것이다. 


아르장퇴유의 황금기 

전쟁이 끝난 후 모네는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정착했다.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모네의 예술적 전성기였다. 센 강변의 이 작은 마을은 모네에게 무궁무진한 주제를 제공했다. 강물에 비친 하늘, 보트를 타는 사람들, 정원의 꽃들,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 

아르장퇴유 시절의 모네는 가장 순수한 인상주의 기법을 구사했다. 그는 같은 장면을 다른 시간, 다른 날씨에 반복해서 그렸다. '아르장퇴유의 다리'만 해도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각 작품은 서로 다른 빛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모네가 추구한 것이었다. 대상 자체가 아니라, 빛이 대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그리는 것. 

이 시기 모네는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뒤랑 뤼엘이 계속해서 작품을 구매했고, 다른 수집가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네는 정원이 딸린 집을 빌려 살 수 있었고, 가족과 함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1874년, 모네와 친구들은 미술계에 폭탄을 던졌다. 공식 살롱전에 지친 그들은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세잔, 시슬레, 베르트 모리조 등 30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다. 

모네는 이 전시회에 '인상, 해돋이'를 포함한 다섯 점의 유화와 일곱 점의 파스텔화를 출품했다. '인상, 해돋이'는 르아브르 항구의 안개 낀 아침을 그린 작품이었다. 빠른 붓질로 포착한 순간의 분위기, 형태보다는 색과 빛의 효과를 중시한 이 작품은 비평가 루이 르루아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인상, 해돋이라고? 벽지 초벌칠이 이것보다 더 완성도가 높겠다!" 르루아는 이들을 비꼬아 '인상주의자들'이라 불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조롱은 새로운 미술 운동의 이름이 되었다. 모네와 친구들은 이 명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정확히 그것을 원했던 것이다. 인상, 즉 순간적인 시각적 경험을 화폭에 담는 것. 


시련의 시기 

1870년대 후반은 모네에게 다시 어두운 시기였다. 1877년 둘째 아들 미셸이 태어났지만, 카미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가중되었다. 1870년대 중반의 경제 불황으로 미술 시장이 침체되면서 뒤랑 뤼엘조차 작품을 사들이기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모네는 아르장퇴유의 집에서 쫓겨났다.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베퇴유로 이사해야 했고, 그곳에서 모네의 후원자였던 에르네스트 오슈데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오슈데 역시 파산한 상태였다. 

이 복잡한 상황은 더욱 기묘해졌다.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와 그들의 여섯 아이들, 그리고 모네의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것이다. 에르네스트 오슈데는 곧 파리로 떠나 사실상 가족을 버렸고, 알리스는 남아서 모네의 가족을 돌보았다. 

1879년 9월 5일, 카미유가 세상을 떠났다. 서른두 살이었다. 모네는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그렸다. '임종의 카미유'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모네의 가장 개인적이고 애절한 그림 중 하나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그녀를 보면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색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나와 인간으로서의 나 사이의 투쟁이었습니다." 

카미유의 죽음 후, 알리스는 모네의 두 아들을 돌보며 사실상 새 어머니 역할을 했다. 모네와 알리스의 관계는 천천히 발전했고, 둘은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알리스는 여전히 법적으로 에르네스트 오슈데의 아내였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오랫동안 공식화되지 못했다. 




재기와 지베르니 

1880년대 초, 모네의 운명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집단 전시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개인전을 열었고, 뒤랑 뤼엘이 다시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모네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연작 작업이었다. 

같은 주제를 다른 빛과 날씨 조건에서 반복해서 그리는 것. 이미 아르장퇴유 시절부터 이런 경향이 있었지만, 1890년대에 이르러 이것은 모네의 핵심 작업 방식이 되었다. '건초더미' 연작이 그 시작이었다. 1890년과 1891년 사이에 모네는 이웃의 밭에 있는 건초더미를 25점 이상 그렸다. 아침, 정오, 저녁, 여름, 겨울. 각각의 그림은 동일한 대상을 보여주지만, 완전히 다른 색채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1891년 뒤랑 뤼엘 갤러리에서 열린 건초더미 연작 전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작품들이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비평가들은 열광했다. 마흔 살이 넘어서야, 모네는 마침내 재정적 안정을 얻었다. 

이미 1883년, 모네는 가족과 함께 지베르니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했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은 모네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집을 빌렸지만, 성공 이후 그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네는 그곳에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원이었다. 모네는 정원 가꾸기에 열정을 쏟았다. 전문 정원사들을 고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원을 조성했다. 다양한 종류의 꽃들을 심었고, 계절마다 다른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도록 계획했다. 정원은 모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892년, 에르네스트 오슈데가 사망한 후, 모네는 마침내 알리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찾은 안정된 가정생활. 모네는 이제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이 안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루앙 대성당과 빛의 탐구 

1890년대 중반, 모네는 자신의 연작 작업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1892년부터 1894년까지, 그는 루앙 대성당을 그렸다. 총 30점 이상의 연작이었다. 모네는 대성당 맞은편 건물의 방을 빌려, 그곳에서 하루 종일 대성당을 관찰했다. 

새벽부터 황혼까지, 빛이 석조 건물의 표면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포착했다. 어떤 그림은 푸른빛이 돌고, 어떤 그림은 장밋빛이며, 또 어떤 그림은 금빛으로 빛난다. 대성당의 형태는 거의 녹아내릴 듯 흐릿하다. 모네에게 중요한 것은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빛이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키는가였다. 

1895년 전시회에서 이 연작을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감동했고, 어떤 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심지어 세잔은 "모네는 눈에 불과하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라고 평했다. 칭찬인지 비판인지 애매한 말이었지만, 모네의 시각적 천재성을 인정한 것은 분명했다. 

이후에도 연작은 계속되었다. 템스 강의 런던 풍경, 베네치아의 궁전들,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 모네는 집착에 가까운 열정으로 빛의 변화를 추적했다. 그에게 회화는 더 이상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빛 그 자체를 포착하는 것이었다. 




수련 연못의 탄생 

1893년, 모네는 자신의 정원에 인접한 땅을 추가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역 주민들은 반대했다. 이국적인 식물들이 지역 생태계를 해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네는 허가를 받아냈고, 일본식 정원을 조성했다. 

에푸트 강의 지류를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었다. 일본식 목조 다리를 놓았고, 버드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등나무 덩굴이 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했다. 모네는 자신만의 동양적 낙원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가 있는 풍경을 그렸다. 1899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일본식 다리 연작들은 아직 전통적인 구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평선이 보이고, 다리가 중심을 이루며, 안정적인 구성이었다. 

하지만 점차 모네의 시선은 물 표면으로 내려갔다. 연못 자체, 특히 수련과 물에 비친 하늘과 나무들. 이것이 모네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주제가 되었다. 수련 연작은 모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된 작업이었고, 총 250점 이상이 제작되었다. 




말년의 고뇌와 승리 

1900년대 들어서면서 모네는 명성의 정점에 있었다. 작품은 높은 가격에 팔렸고, 전 세계의 수집가들이 그의 그림을 원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련이 계속되었다. 

1908년, 모네는 시력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지만, 점차 심각해졌다. 백내장이었다. 화가에게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모네는 공포에 빠졌다. 색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고, 팔레트에 색 이름을 적어두고 작업해야 했다. 

1911년, 알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2년 후에는 장남 장마저 죽었다. 연이은 죽음으로 모네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친구들의 격려, 특히 정치가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조르주 클레망소의 설득으로 모네는 다시 붓을 들었다. 클레망소는 모네에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대형 수련 장식화를 그려 프랑스에 기증하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모네의 나이 일흔넷이었다. 전쟁의 소식은 모네를 슬프게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거대한 캔버스들을 작업하기 위해 새 스튜디오를 지었다. 2미터가 넘는 높이에 폭이 12미터가 넘는 캔버스들. 거의 벽화 크기였다. 

모네는 이 거대한 작품들 앞에서 하루 종일 작업했다. 시력이 나빠져도, 관절염으로 손이 떨려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캔버스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완벽주의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1923년, 모네는 마침내 백내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두려웠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수술은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다시 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수술 후 모네의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외선 영역의 색들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오랑주리의 수련 

모네는 대형 수련 장식화 작업을 계속했다. 프랑스 정부와 협상하여, 이 작품들을 오랑주리 미술관의 특별한 타원형 방에 영구 설치하기로 했다. 모네의 요구사항은 까다로웠다. 자연광이 들어와야 하고, 작품들이 벽 전체를 감싸야 하며, 관람객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 작품들은 모네의 이전 작업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수평선이 없었다. 하늘과 물의 경계가 모호했다. 수련과 구름, 나뭇가지의 반영이 뒤섞여 추상에 가까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어떤 부분은 거의 추상표현주의를 예고하는 듯했다. 

1926년 12월 5일, 모네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든여섯 살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화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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