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뉴스 · 2025.12.23 | view.21 · recommend.0

Installation view of "Madalena Santos Reinbolt: A Head Full of Planets," 2025, at American Folk Art Museum, New York.
올해 뉴욕에 섬유 예술 열풍이 공식적으로 도착했습니다.
제임스 코헨 갤러리에서 클라우디아 알라르콘과 실랫의 훌륭한 전시가 있었고, 마젠타 플레인스에서 하나 밀레티치의 전시, 시케마 젠킨스 말로이에서 테레사 란세타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한 전시가 다른 모든 전시를 뛰어넘었습니다.
2022년 상파울루 미술관에서 선보인 후 미국에 첫 선을 보인 이 회고전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주거지 요리사로 일하며 양모 조각들을 예술 작품에 활용했던 마달레나 산토스 레인볼트를 조명했습니다.
"양모 그림"으로 알려진 그 결과물들은 아프리카계 브라질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삶에 대한 통찰만큼이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전에 단 한 번의 인터뷰만 했던 산토스 레인볼트에 대한 전기 자료는 거의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 전시와 동반 카탈로그의 존재가 기적에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Installation view of "P. Staff: Possessive," 2025, at David Zwirner, New York.
올 가을 P. 스태프의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데이비드 츠비르너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창문은 오줌 같은 노란색으로 착색되어 있었는데, 이는 내부에 담긴 신체적 동요를 미리 보여주는 적절한 예고편이었습니다.
내부에는 라텍스로 덮인 나무 가시로 구성된 조각품들과 타운하우스 3개 층 전체에 걸쳐 조각조각 투사된 거대한 비디오 작품이 있었습니다.
<침투(Penetration)>(2025)라는 제목의 그 비디오는 복부에 레이저 빔이 조준된 중성적인 인물을 보여주었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불안한 이미지를 제공했습니다.
그 작품의 베이스가 강조된 사운드트랙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스태프가 뭔가를 포착했다는 신호입니다.

Ben Shahn, Bartolomeo Vanzetti and Nicola Sacco, 1931–32.

Installation view of "Laura Owens" at Matthew Marks Gallery.

Installation view of "Jack Whitten: The Messenger," 2025, at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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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의 이해: 빛과 순간을 포착한 혁명 -2-
4. 인상주의의 전개와 변화인상주의는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총 8번의 그룹 전시를 개최했다. 이 기간 동안 운동은 진화했고, 내부적인 긴장도 발생했다. 일부 화가들은 더 순수한 인상주의를 추구했고, 다른 이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1880년대 중반, 인상주의는 위기를 맞았다. 일부 화가들은 인상주의가 너무 피상적이고 형태와 구조를 소홀히 한다고 느꼈다. 르누아르는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르네상스의 고전적 형태미에 끌렸고, 일시적으로 더 단단한 윤곽선과 전통적인 구성을 추구했다.[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한편,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은 인상주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더 나아갔다.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는 점묘법(또는 신인상주의)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인상주의의 색채 이론을 더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적용했다. 작은 색점들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시각적 혼합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인상주의의 논리적 확장이었지만, 자발성과 즉흥성은 사라졌다.폴 세잔은 인상주의의 빛과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형태와 구조를 회복하려 했다. "자연을 원통, 구, 원뿔로 다루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인상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세잔의 작업은 입체파와 20세기 현대미술의 기초가 되었다.5. 후대에 미친 영향: 현대미술의 문을 열다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예술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였다. 인상주의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여러 차원에서 나타난다.5.1 예술적 자유와 독립인상주의 화가들은 아카데미와 살롱의 권위에 도전하여 자신들만의 전시를 개최했다. 이는 예술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주장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예술가들은 기존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전시 방식, 갤러리 시스템, 후원자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예술가의 자유는 인상주의자들의 반란에서 시작되었다.5.2 주관성과 개인적 시각의 가치인상주의는 객관적 재현보다 주관적 인상을 중시했다. 이는 예술이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개인적 경험과 감각을 표현하는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주관성의 강조는 후기인상주의, 표현주의, 추상미술로 이어지는 20세기 미술의 기초가 되었다.반 고흐는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를 받아들이면서도 내면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고갱은 인상주의의 자연관찰을 넘어 상징과 상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마티스와 야수파는 인상주의의 순수한 색채를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여 비자연적인 색채의 폭발을 만들어냈다.[인상주의가 만들어낸 예술 사조의 확장]5.3 추상미술로의 길 인상주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추상미술의 길을 열었다. 모네의 후기 수련 연작은 형태가 거의 해체되어 색채와 빛의 순수한 효과만 남았다. 이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같은 추상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시각적 경험 자체가 예술의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5.4 미국 미술에 대한 영향20세기 초, 많은 미국 화가들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인상주의를 배웠다. 메리 카사트는 드가와 가까이 지내며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미국인 화가였다. 칠드 하삼, 존 싱어 사전트 등은 인상주의 기법을 미국 풍경과 도시 장면에 적용했다. 1913년 뉴욕의 아모리 쇼는 미국에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인상주의는 그 중심에 있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했을 때, 비평가들은 그것을 인상주의의 후손으로 해석했다. 잭슨 폴록의 올 오버 회화는 모네의 수련 연작과 비교되었다. 형태의 해체, 순수한 색채와 제스처, 평면적 구성 등 인상주의에서 시작된 요소들이 추상표현주의에서 극단적으로 발전했다.5.5 대중문화와 미술 시장오늘날 인상주의는 가장 사랑받는 미술 양식 중 하나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의 작품은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 주제이며, 경매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된다. 인상주의는 현대미술과 대중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에 비해 접근하기 쉽고,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직접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인상주의의 이미지는 포스터, 머그컵, 달력 등 상업적으로 무한히 재생산된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예술을 대중화하고 민주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상주의의 혁명적 성격을 희석시키고 장식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6. 에필로그: 여전히 빛나는 혁명1874년 조롱으로 시작된 인상주의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법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새로운 감각, 그리고 예술가의 자유를 주장했다.인상주의는 우리에게 천천히 보는 법을 가르친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들의 작품은 빛이 물 위에서 춤추는 순간,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불완전하지만 생생한, 거칠지만 진실한 순간을 포착했다.인상주의의 진정한 혁명은 기술적 혁신을 넘어선다. 그것은 태도의 혁명이었다. 권위에 순응하지 않고,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시각을 믿는 용기였다. 1874년 전시를 열었던 젊은 화가들은 자신들이 미술사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오늘날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자연스러운 빛을 찾고,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하려 하며, 일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것은 모두 인상주의의 유산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인상주의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보는 것, 순간의 덧없음 속에서 영원함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용기를 갖는 것.인상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매번 누군가가 평범한 순간에서 비범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마다, 빛의 마법에 감탄할 때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할 용기를 낼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150년 전 파리의 젊은 화가들이 시작한 혁명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눈 속에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속에서. 빛은 여전히 변하고, 순간은 여전히 흐른다. 그리고 인상주의의 정신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멈추고, 보고, 느끼라.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아트스토리 · 2025.12.25 | view.10
인상주의의 이해: 빛과 순간을 포착한 혁명 -1-
프롤로그: 한 번의 전시가 바꾼 미술사 1874년 4월 15일, 파리의 한 사진작가 스튜디오에서 열린 전시회는 미술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를 지배하던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젊은 화가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전시를 개최했고,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클로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를 조롱하며 이들을 "인상주의자(Impressionnistes)"라고 불렀다. 조롱으로 시작된 이 명칭은 역설적으로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운동의 이름이 되었다. [클로드 모네 - 인상, 해돋이]1. 인상주의란 무엇인가: 정의와 핵심 특징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미술 운동으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빛과 색채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통적인 아카데미 미술이 스튜디오에서 완벽하게 다듬어진 작품을 추구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로 나가 자연의 빛 아래서 변화하는 순간을 캔버스에 담았다. 인상주의의 핵심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짧고 빠른 붓터치를 사용하여 빛의 효과를 포착했다. 전통적인 회화가 부드럽게 혼합된 색채와 보이지 않는 붓자국을 추구했다면, 인상주의자들은 의도적으로 붓터치를 드러냈다. 가까이서 보면 거칠고 분리된 색점들이 멀리서 보면 조화롭게 섞여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둘째, 순수한 색채를 직접 캔버스에 배치했다. 팔레트에서 색을 섞기보다는 캔버스 위에서 색채가 시각적으로 혼합되도록 했다. 이는 과학적 색채 이론, 특히 외젠 슈브뢸의 보색 대비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셋째, 일상적인 현대 생활을 주제로 삼았다. 신화나 역사적 사건이 아닌, 파리의 카페, 기차역, 댄스홀, 그리고 자연 풍경이 그들의 캔버스를 채웠다. 넷째, 빛의 변화와 대기의 효과를 중시했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 다른 계절에 반복해서 그림으로써 빛이 어떻게 색채와 형태를 변화시키는지 탐구했다. 모네의 연작 작업들, 예를 들어 루앙 대성당이나 수련 연작은 이러한 탐구의 정점을 보여준다. 다섯째, 전통적인 원근법과 구도의 규칙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각적 접근을 시도했다.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평면적인 구도와 대담한 크롭을 사용했으며, 때로는 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한 듯한 구성을 선택했다.2. 혁명의 씨앗: 인상주의의 탄생 배경 인상주의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예술가들의 시각과 작업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상주의 탄생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기술적, 예술적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2.1 산업화와 도시의 변화19세기 프랑스는 산업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철도의 확장으로 화가들은 파리 외곽의 풍경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야외 작업(플랭 에르, plein air)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화가들은 아르장퇴유, 부지발, 루브시엔느 같은 센 강변 마을로 나가 직접 자연의 빛 아래서 작업할 수 있었다. 또한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개발 사업(1853-1870)은 파리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좁고 어두운 중세 거리는 넓은 대로로 대체되었고, 공원과 광장이 조성되었다. 이 새로운 근대 도시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주제가 되었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나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은 이 새로운 도시 경험을 포착한 작품들이다. [좌 :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우: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2.2 과학과 기술의 발전색채 이론의 발전도 인상주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미셸 외젠 슈브뢸은 1839년 '색채의 동시 대비 법칙'을 출판했고, 이는 색채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제공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이론을 실험적으로 적용하여, 보색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색채의 강렬함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탐구했다. 튜브 물감의 발명(1841년)은 야외 작업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기술적 혁신이었다. 이전에는 화가들이 안료를 갈아서 직접 물감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스튜디오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휴대 가능한 이젤과 튜브 물감 덕분에 화가들은 자연 속에서 직접 작업하며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빛을 포착할 수 있었다. 사진술의 발명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39년 다게레오타입의 등장 이후 사진은 빠르게 발전했다. 사진이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회화는 더 이상 단순한 재현의 역할에 만족할 수 없었다. 화가들은 사진이 할 수 없는 것, 즉 주관적 인상과 순간의 느낌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역설적으로 사진의 즉각적인 프레이밍과 구도는 인상주의 회화의 구성에도 영향을 주었다.2.3 예술계의 반발과 독립19세기 중반 프랑스 미술계는 아카데미와 살롱전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역사화, 신화적 주제, 완벽한 기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살롱전은 예술가들에게 명성과 판매 기회를 제공하는 유일한 통로였지만, 심사 기준은 보수적이고 엄격했다. 1863년, 살롱전 심사가 유난히 엄격하여 수많은 작품이 거부되자, 나폴레옹 3세는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을 열도록 허가했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이 전시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누드화의 관습을 깨고 현대적 배경에 옷 입은 남성과 벗은 여성을 함께 배치한 이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존 체제에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마네를 중심으로 젊은 화가들은 카페 게르부아에서 만나 예술과 사회에 대해 토론했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시슬레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살롱전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전시를 열기로 결정했다. 1874년의 첫 인상주의 전시는 이러한 독립 정신의 결과물이었다.3. 빛을 그린 사람들: 주요 인상주의 화가들인상주의는 단일한 양식이 아니라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한 개별 예술가들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각 화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접근 방식과 주제를 발전시켰다. 3.1 클로드 모네: 순수한 빛의 추구클로드 모네(1840-1926)는 인상주의의 가장 순수한 실천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형태보다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모네의 작업 방식은 거의 과학적이었다. 그는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 다른 계절에 반복해서 그림으로써 빛이 어떻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지 연구했다.루앙 대성당 연작(1892-1894)에서 모네는 대성당의 파사드를 30점 이상 그렸다. 각 작품은 다른 시간대의 빛을 포착했다. 아침의 푸른 빛, 정오의 강렬한 햇빛, 저녁의 따뜻한 빛이 돌의 색채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건축물의 세부보다는 빛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진동이 중요했다.말년에 지베르니의 자택에 만든 수련 연못은 모네에게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거대한 수련 연작(1897-1926)에서 그는 물, 빛, 반영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색채의 세계를 탐구했다. 이 후기 작품들은 형태가 거의 사라지고 순수한 색채와 빛의 효과만 남아, 20세기 추상미술을 예고했다.[등나무]3.2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삶의 기쁨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인상주의 화가들 중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빛과 색채의 기술적 탐구보다는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낙관주의와 생명력이 넘쳤다.'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는 르누아르의 대표작 중 하나로, 몽마르트르의 야외 댄스홀에서 즐기는 파리 시민들을 그렸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사람들의 옷과 얼굴에 반짝이는 색점을 만들어냈다. 움직임과 즐거움, 빛과 그림자가 조화를 이루며, 순간의 행복을 영원히 포착했다.르누아르는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 뛰어났다. 그의 여성 인물화는 부드럽고 풍만하며, 진주빛 살결은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1880년대에 그는 잠시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더 고전적인 형태를 추구했지만, 결국 자신만의 따뜻하고 밝은 색채로 돌아왔다.3.3 에드가 드가: 움직임의 포착에드가 드가(1834-1917)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다소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야외 풍경보다는 실내, 특히 발레 무용수와 경마장 같은 도시의 현대적 장면에 관심이 있었다. 드가는 순간적인 움직임과 비전통적인 구도를 탐구했다.발레 무용수 연작에서 드가는 무대 위의 화려한 공연보다는 리허설 장면, 대기하는 무용수, 피곤해하는 뒷모습을 그렸다. 그는 일본 판화와 사진의 영향을 받아 인물을 캔버스 가장자리에 배치하거나 과감하게 잘라내는 구도를 사용했다. 이러한 접근은 순간을 포착한 듯한 생동감을 만들어냈다.[발레수업]드가는 파스텔 매체를 특히 선호했다. 파스텔의 부드러운 질감과 밝은 색채는 무용수의 의상과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이상적이었다. 그의 작품은 기술적으로 매우 정교했지만, 동시에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느낌을 전달했다.3.4 카미유 피사로: 인상주의의 멘토카미유 피사로(1830-1903)는 인상주의 화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젊은 화가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 그는 모든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화가였으며, 세잔, 고갱 같은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피사로는 겸손하고 원칙적인 성격으로 존경받았으며, 정치적으로는 아나키스트였다.피사로의 작품은 주로 시골 풍경과 농촌 생활을 다루었다. 그는 농민들의 일상, 시장, 과수원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1880년대에는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에 영향을 받아 잠시 더 체계적인 색채 분할 기법을 실험했지만, 이 방법이 너무 기계적이라고 느껴 다시 자유로운 붓터치로 돌아왔다.말년에 피사로는 도시 풍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파리의 대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연작에서 그는 도시의 활기와 움직임을 포착했다. 이 작품들은 근대 도시의 익명성과 에너지를 동시에 표현했다.[몽마르트 대로 밤풍경]2부에서 계속 됩니다...
아트스토리 · 2025.12.25 | view.12
그림 액자 사이즈, 어떻게 고를 것인가
그림이 아닌 ‘공간’을 먼저 보는 법 그림 액자를 고를 때 대부분은 먼저 작품을 본다. 색감, 화가, 분위기.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이 그림, 몇 호예요?” 하지만 실제 인테리어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회화 작품을 다뤄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액자 사이즈를 결정하는 기준은 그림이 아니라 공간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벽에, 어떤 거리에서, 어떤 시선 높이로 걸리느냐에 따라 ‘작품’이 되기도 하고, ‘장식’으로 사라지기도 한다.1. 액자 사이즈는 벽의 크기에서 시작된다회화 작품 액자 사이즈를 고를 때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벽의 여백이다. 벽 전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액자(프레임 포함)는 보통 벽 가로 폭의 60~75%를 차지할 때 가장 안정적으로 보인다. 작은 벽에 큰 액자를 걸면 답답해 보이고, 넓은 벽에 작은 회화 액자를 걸면 그림은 존재감을 잃는다. 특히 거실 인테리어에서 명화 그림액자를 선택할 경우, 소파 위 벽이라면 소파 가로 길이의 2/3 정도 되는 사이즈가 가장 실패가 적다. 이 비율은 미술관 전시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안정적인 기준이다.2. 작품 크기보다 ‘감상 거리’를 먼저 계산한다회화 작품은 가까이서 보는 물건이 아니다. 액자 사이즈를 고를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바로 감상 거리다. 1~1.5m 거리 → 중소형 회화 액자 2~3m 거리 → 중형 이상 액자 3m 이상 거리 → 대형 회화 또는 연작 구성 거실처럼 시선이 멀어지는 공간에서는 생각보다 큰 사이즈의 명화 액자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커서 놀랐어요”라는 말은, 사실 제대로 고른 경우에 더 자주 나온다. 3. 회화 작품은 ‘프레임 포함 사이즈’로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작품 크기만 보고 액자 사이즈를 결정하는 것이다. 회화 작품은 프레임이 더해지는 순간, 최종 사이즈가 5~15cm 이상 커질 수 있다. 특히 클래식한 명화 액자나 두꺼운 원목 프레임의 경우, 프레임 자체가 시각적 무게를 크게 만든다. 모던 인테리어라면 슬림 프레임 + 여백 있는 매트, 클래식 인테리어라면 프레임이 존재감을 가져도 좋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액자는 공간에서 과해지거나 가벼워진다.4. 작은 그림을 크게 보이게 하는 방법도 있다 모든 공간에 큰 회화 액자를 걸 수는 없다. 그럴 때는 사이즈를 키우는 대신 구성으로 해결한다. 매트(여백)를 넉넉하게 사용하기 2~3점 연작으로 구성하기 수직 구성을 활용해 시선 높이 늘리기 특히 작은 명화 그림액자는 화이트 매트를 활용하면 훨씬 작품처럼 보인다. 이는 미술관 전시에서도 사용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5. 결국 액자 사이즈는 ‘취향의 언어’다회화 작품 액자 사이즈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기준은 있다. 공간을 존중하는 사이즈, 그리고 그림이 숨 쉴 수 있는 여백이다. 작은 그림을 아끼는 방식도, 큰 그림으로 공간을 장악하는 방식도 모두 취향이다. 다만 그 취향이 공간과 대화할 때, 비로소 그림은 인테리어를 넘어 작품이 된다.
인테리어 · 2025.12.24 | view.17
2025년 뉴욕 최고의 전시 작품들 -1-
10. Terran Last Gun at Chapter NYTerran Last Gun, Positive Energy Remains During Dark Times, 2025.테란 라스트 건의 드로잉은 언뜻 보면 단순합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색 블록 몇 개를 배치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 종이들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피카니 부족 출신인 라스트 건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100년도 넘은 장부 용지를 작업에 사용합니다. 이는 19세기 평원 인디언들의 장부 예술 전통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당시 원주민 예술가들은 회계 장부처럼 쓰다 남은 종이 위에 전투 장면을 그렸습니다. 식민지배자들의 물건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이었죠. 라스트 건은 이러한 전통에 현대적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그의 추상 작품 속 형태들은 블랙풋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차원의 문을 상징합니다. 노란색과 분홍색 평면으로 열리는 그의 출입구와 창문들은 오랜 폭력의 역사 너머,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을 조용히 이야기합니다.9. Isaiah Davis at King’s LeapIsaiah Davis, Slave, 2025.이사야 데이비스의 현재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매혹적인 조각 작품 <Slave>(2025)는 올해 가장 놀라운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바퀴가 달린 이 조각은 보통 새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요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펼쳐보면 두 개의 쇠사슬이 강철 절반들을 함께 묶고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모두가 계속 내 마음을 부수려 해"와 같은 문구들이 용접되어 있는 이 조각은 그 자체로 가슴 아픈 작품입니다. 압박 앞에서 정보를 감춰야 하는 필요성과, 그 결과 결코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불가능성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죠. 요즘 많은 젊은 작가들이 그렇듯, 데이비스도 버려진 것 같은 오브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신비롭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드뭅니다.8. Lotus L. Kang at 52 WalkerLotus L. Kang, Azaleas II, 2025.에보니 L. 헤인즈의 디렉팅 아래 52 워커는 올해도 뉴욕의 다른 어떤 갤러리도 감히 시도하지 못할 전시들로 강렬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로터스 L. 강의 놀라운 전시였습니다. 작년 휘트니 비엔날레 이후 선보인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풍성했죠. 전시 중심부에는 두 개의 온실로 구성된 설치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49개의 오브제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멸치, 엉킨 다시마, 필름 스트립 등을 금속으로 주조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온실들은 변화의 공간과 알 수 없는 의미가 깃든 사물들에 대한 강의 관심을 잘 보여줬습니다. 아래층에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설치 작품 <Azaleas II>(2025)가 있었습니다. 꽃 이미지가 담긴 셀룰로이드 필름 조각들이 천천히 회전하는 구조물을 감싸고 있었고, 조명이 그것을 비췄습니다. 이 장치가 돌아가면서 어두운 공간은 묘하게 아름다운 보라빛으로 물들었습니다.7. Juliana Seraphim at 55 WalkerJuliana Seraphim, Untitled, 1978.올해 뉴욕은 초현실주의의 해였습니다. MoMA의 훌륭한 위프레도 람 회고전 같은 정통 초현실주의부터, 휘트니의 "60년대 초현실", 앤드류 크렙스 갤러리의 해롤드 스티븐슨, 토마소 칼라브로, 그리고 업스테이트 아트 오미 조각 공원까지 초현실주의에서 영감받은 전시들이 풍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초현실주의 작품도 줄리아나 세라핌의 회화만큼 제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인 세라핌은 1948년 나크바 이후 가족과 함께 레바논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녀의 캔버스에는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 풍성한 깃털을 가진 새들, 물담배를 피우는 공주들이 등장합니다. 1978년 작품 중 하나는 더욱 인상적인데, 거대한 눈이 물고기와 조개, 탑들로 가득한 아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크렙스, 보르톨라미, 카우프만 레페토가 기획한 이 전시는 저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세라핌에 대해 조사했을 때, 그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누군가 빨리 그녀의 회고전을 열어주길 바랍니다.6. Ayoung Kim at MoMA PS1Ayoung Kim, Delivery Dancer’s Arc: Inverse, 2024.매년 뉴욕에는 그 해를 대표하는 신예 스타가 나타납니다. 올해는 아영 김이었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주목받던 그녀는 올 가을 MoMA PS1 전시와 퍼포마 커미션을 통해 화려하게 미국 데뷔를 했습니다. PS1 전시의 중심은 매혹적인 '배달 댄서' 시리즈입니다. 세 편의 비디오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여성 배달 노동자들이 서로 싸우는 장면이 펼쳐지는데, 현대 서울과 김아영이 창조한 미래 세계를 유려하게 오갑니다. 게임 엔진과 AI를 활용하고, 애니메이션 하위 장르부터 불안정성 이론까지 끌어온 김아영은 공상과학적 스펙터클을 마음껏 펼쳐냅니다. PS1은 세 편의 '배달 댄서' 비디오 설치 중 가장 뛰어난 작품에 거대한 공간을 따로 내주었습니다.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어서 기대어 누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트뉴스 · 2025.12.22 | view.29
2025년을 대표하는 예술 작품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약화되고 검열은 점점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예술가들은 2025년에도 멈추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경찰 폭력과 권력 남용, 기후 변화, 트랜스젠더 권리 등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중요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룬 의미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시대에,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각자의 방식으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느껴집니다. 이 목록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예술가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또한 이번 목록은 과거의 예술 역시 오늘의 정서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함께 소개된 이전 세대의 작품들은 역사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음을 조용히 전하고 있습니다.25, Adrien Brody, My Marilyn에이드리언 브로디는《피아니스트》(2002)와《브루탈리스트》(2024)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예술가’라는 역할만큼은 성공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여름 전시 《메이드 인 아메리카》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미키 마우스나 마릴린 먼로처럼 이미 수없이 재해석된 아이콘들을 다뤘지만, 지나치게 과장되고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는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매트릭스》(1999)에서 “부자가 되고 싶다. 배우처럼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대사가 떠오르듯, 많은 이들이 배우를 동경합니다. 그러나 막대한 부와 명성을 가진 배우들조차도 마음속으로는 예술가가 되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 점만큼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아도 되지 않을까요.18. Ayoung Kim, Delivery Dancer’s Arc: Inverse, 2024올해 미국 미술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작가로는 한국의 아영 김 작가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올가을 《아트포럼》과 《프리즈》의 표지를 동시에 장식하며 큰 화제를 모았고, 같은 시기 《ARTnews》에서도 집중 조명을 받았습니다. 단기간에 쏟아지는 관심에 대한 경계도 있을 수 있지만, 현재 MoMA PS1 전시와 지난해 11월 선보인 퍼포마 커미션을 통해 그녀의 실력은 분명히 입증되었습니다. PS1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이 비디오 설치 작품은 오토바이를 타는 여성 배달 노동자들을 다룬 3부작 중 한 편으로, 서로를 끌어당기고 동시에 대립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그려냅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세 개의 대형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은 게임 엔진과 AI로 제작된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미래적인 세계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경사로와 계단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 세계는 현실과 달라 보이지만, 그 안을 오르는 노동자들이 마주한 자본주의적 경쟁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4. Jade Guanaro Kuriki-Olivo (Puppies Puppies), Liberté Morte (Dead Liberty), 20252016년, 제이드 구아나로 쿠리키-올리보는 다양한 젠더 정체성을 지닌 퍼포머들이 자유의 여신상으로 분장해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드래그 쇼처럼 전환한 퍼포먼스 《리베르테》를 선보였습니다. 그로부터 9년, 두 차례의 트럼프 행정부를 거친 뒤 작가는 《리베르테 모르트(죽은 자유)》라는 조각 작품으로 그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받침대 위에 힘없이 펼쳐진 자유의 여신상 의상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미국에서 트랜스젠더가 더욱 주변화된 현실에 대한 어두운 응답입니다. 이는 지금처럼 취약해진 ‘자유’라는 개념이 미국에서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암시합니다.3. Amy Sherald, Trans Forming Liberty, 2024에이미 셔럴드의 회고전 《아메리칸 서블라임》에서 처음 공개된 《트랜스 포밍 리버티》(2024)는 흑인 트랜스-팜 모델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아레와 바싯이 자유의 여신상처럼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별다른 논란 없이 전시되었으나, 워싱턴 D.C.의 국립초상화미술관으로 옮겨지기 전, 작품 철거 시도가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며 검열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이에 셔럴드는 전시를 취소하고 검열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았습니다. 셔럴드는 회피하지 않고, 이 작품이 모든 몸과 정체성의 존엄을 포함하는 더 넓은 자유의 개념을 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자유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며, 우리 또한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항의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뉴요커》 8월 11일자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1. Kara Walker, Unmanned Drone, 2023카라 워커의 《무인 드론》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올해 《모뉴먼츠》 전시에서 더 브릭 섹션의 중심 작품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대형 조각에서 워커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법원 앞에 세워졌던 남군 장군 스톤월 잭슨과 그의 말 리틀 소럴의 기마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했습니다. 1921년에 제작된 원래의 동상은 남북전쟁 이후 ‘잃어버린 대의’라는 왜곡된 신화를 강화해 왔습니다. 워커는 이 조각을 의도적으로 분절하고, 인간과 말의 신체가 기괴하게 뒤섞이도록 다시 결합함으로써 그러한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드러냅니다. 이 작업은 거대하고 견고해 보이는 인종주의적 역사 서사 역시 해체 가능하며, 결국 그 이면에 숨겨진 허구를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트뉴스 · 2025.12.21 | view.28
클로드 모네: 빛을 그린 화가의 일생
바다가 키운 소년 1840년 11월 14일, 파리의 한 골목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훗날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오스카르 클로드 모네였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감수성이 진정으로 깨어난 곳은 파리가 아니었다. 다섯 살이 되던 해, 가족이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르아브르로 이주하면서 모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르아브르의 바다는 어린 모네에게 첫 번째 화폭이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하늘의 색, 파도가 만들어내는 빛의 유희,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의 실루엣. 이 모든 것이 소년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학교 수업은 지루했지만, 수업 중에 선생님과 친구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일만큼은 즐거웠다. 열다섯 살 무렵, 그의 캐리커처는 지역에서 제법 알려졌고, 그림 한 점당 20프랑이라는 꽤 괜찮은 값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네의 운명을 바꾼 것은 캐리커처가 아니었다. 1856년, 화구상에 자신의 캐리커처를 걸어두었던 모네는 그곳에서 외젠 부댕이라는 풍경화가를 만났다. 부댕은 이미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그리는 "플랑 에르"(plein air) 기법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자연을 직접 보고 그려야 합니다. 실외에서 그림을 그리세요"라는 부댕의 조언은 모네에게 계시와도 같았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캐리커처로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힘든 풍경화를 그려야 할까? 하지만 부댕과 함께 해변으로 나가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순간, 모네는 자신이 평생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베일이 찢어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회화가 무엇인지 이해했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파리에서의 고군분투 1859년, 열아홉 살의 모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향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당시 화가가 되기 위한 정석 코스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역사화나 신화화를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네는 그런 아카데믹한 접근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대신 그는 아카데미 쉬스에서 공부하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 예술가들을 만났다.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귀스타브 쿠르베 같은 이들과의 만남은 모네의 예술 세계를 확장시켰다. 특히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모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인 주제가 아닌 일상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다.하지만 1861년, 예술에 몰두하던 모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징집 통지서였다. 알제리로 군 복무를 떠난 모네는 그곳에서도 북아프리카의 강렬한 빛과 색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장티푸스에 걸려 1년 만에 제대하게 되었고, 이모가 나머지 복무 기간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돈을 대주었다. 조건은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1862년, 모네는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들이 이어졌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릭 바지유. 이들은 곧 친구이자 동지가 되었고, 함께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숲으로 나가 야외 스케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글레르의 아틀리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기법을 강조했다. 모네와 친구들은 점점 더 자신들만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카미유, 그리고 새로운 시작1865년은 모네에게 중요한 해였다. 그는 처음으로 살롱전에 두 점의 해경화를 출품했고, 놀랍게도 두 작품 모두 입선했다. 비평가들은 이 신진 화가를 주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그해 모네는 카미유 동시외라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카미유는 모델로 일하고 있었고, 모네는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뮤즈가 되었다. 모네의 가장 유명한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초록 드레스의 여인'의 주인공이 바로 카미유였다. 이 작품은 1866년 살롱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사랑과 예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재정 상태는 늘 불안정했다. 1867년, 카미유가 첫 아들 장을 임신했을 때 모네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카미유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경제적 지원을 끊었다. 모네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며 간신히 버텼다. 절망적인 순간에는 센 강에 몸을 던지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럼에도 모네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1869년, 그는 르누아르와 함께 센 강변의 라 그르누예르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서 작업한 연작들은 인상주의의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빠른 붓놀림, 순수한 색채, 빛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시도.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들은 '미완성'이었다. 하지만 모네에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순간의 인상을 담아내고자 했다. 1870년 6월, 모네는 마침내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징집을 피해 모네는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피신했다. 이 시기 런던에서 모네는 터너와 컨스터블의 작품을 접했다. 특히 터너의 대기 효과와 빛의 표현은 모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런던에서 모네는 화상 폴 뒤랑 뤼엘을 만났다. 이 만남은 모네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뒤랑 뤼엘은 모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비록 큰돈은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긴 것이다. 아르장퇴유의 황금기 전쟁이 끝난 후 모네는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정착했다.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모네의 예술적 전성기였다. 센 강변의 이 작은 마을은 모네에게 무궁무진한 주제를 제공했다. 강물에 비친 하늘, 보트를 타는 사람들, 정원의 꽃들,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 아르장퇴유 시절의 모네는 가장 순수한 인상주의 기법을 구사했다. 그는 같은 장면을 다른 시간, 다른 날씨에 반복해서 그렸다. '아르장퇴유의 다리'만 해도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각 작품은 서로 다른 빛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모네가 추구한 것이었다. 대상 자체가 아니라, 빛이 대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그리는 것. 이 시기 모네는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뒤랑 뤼엘이 계속해서 작품을 구매했고, 다른 수집가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네는 정원이 딸린 집을 빌려 살 수 있었고, 가족과 함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1874년, 모네와 친구들은 미술계에 폭탄을 던졌다. 공식 살롱전에 지친 그들은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세잔, 시슬레, 베르트 모리조 등 30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다. 모네는 이 전시회에 '인상, 해돋이'를 포함한 다섯 점의 유화와 일곱 점의 파스텔화를 출품했다. '인상, 해돋이'는 르아브르 항구의 안개 낀 아침을 그린 작품이었다. 빠른 붓질로 포착한 순간의 분위기, 형태보다는 색과 빛의 효과를 중시한 이 작품은 비평가 루이 르루아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인상, 해돋이라고? 벽지 초벌칠이 이것보다 더 완성도가 높겠다!" 르루아는 이들을 비꼬아 '인상주의자들'이라 불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조롱은 새로운 미술 운동의 이름이 되었다. 모네와 친구들은 이 명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정확히 그것을 원했던 것이다. 인상, 즉 순간적인 시각적 경험을 화폭에 담는 것. 시련의 시기 1870년대 후반은 모네에게 다시 어두운 시기였다. 1877년 둘째 아들 미셸이 태어났지만, 카미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가중되었다. 1870년대 중반의 경제 불황으로 미술 시장이 침체되면서 뒤랑 뤼엘조차 작품을 사들이기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모네는 아르장퇴유의 집에서 쫓겨났다.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베퇴유로 이사해야 했고, 그곳에서 모네의 후원자였던 에르네스트 오슈데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오슈데 역시 파산한 상태였다. 이 복잡한 상황은 더욱 기묘해졌다.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와 그들의 여섯 아이들, 그리고 모네의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것이다. 에르네스트 오슈데는 곧 파리로 떠나 사실상 가족을 버렸고, 알리스는 남아서 모네의 가족을 돌보았다. 1879년 9월 5일, 카미유가 세상을 떠났다. 서른두 살이었다. 모네는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그렸다. '임종의 카미유'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모네의 가장 개인적이고 애절한 그림 중 하나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그녀를 보면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색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나와 인간으로서의 나 사이의 투쟁이었습니다." 카미유의 죽음 후, 알리스는 모네의 두 아들을 돌보며 사실상 새 어머니 역할을 했다. 모네와 알리스의 관계는 천천히 발전했고, 둘은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알리스는 여전히 법적으로 에르네스트 오슈데의 아내였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오랫동안 공식화되지 못했다. 재기와 지베르니 1880년대 초, 모네의 운명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집단 전시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개인전을 열었고, 뒤랑 뤼엘이 다시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모네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연작 작업이었다. 같은 주제를 다른 빛과 날씨 조건에서 반복해서 그리는 것. 이미 아르장퇴유 시절부터 이런 경향이 있었지만, 1890년대에 이르러 이것은 모네의 핵심 작업 방식이 되었다. '건초더미' 연작이 그 시작이었다. 1890년과 1891년 사이에 모네는 이웃의 밭에 있는 건초더미를 25점 이상 그렸다. 아침, 정오, 저녁, 여름, 겨울. 각각의 그림은 동일한 대상을 보여주지만, 완전히 다른 색채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1891년 뒤랑 뤼엘 갤러리에서 열린 건초더미 연작 전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작품들이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비평가들은 열광했다. 마흔 살이 넘어서야, 모네는 마침내 재정적 안정을 얻었다. 이미 1883년, 모네는 가족과 함께 지베르니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했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은 모네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집을 빌렸지만, 성공 이후 그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네는 그곳에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원이었다. 모네는 정원 가꾸기에 열정을 쏟았다. 전문 정원사들을 고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원을 조성했다. 다양한 종류의 꽃들을 심었고, 계절마다 다른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도록 계획했다. 정원은 모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892년, 에르네스트 오슈데가 사망한 후, 모네는 마침내 알리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찾은 안정된 가정생활. 모네는 이제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이 안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루앙 대성당과 빛의 탐구 1890년대 중반, 모네는 자신의 연작 작업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1892년부터 1894년까지, 그는 루앙 대성당을 그렸다. 총 30점 이상의 연작이었다. 모네는 대성당 맞은편 건물의 방을 빌려, 그곳에서 하루 종일 대성당을 관찰했다. 새벽부터 황혼까지, 빛이 석조 건물의 표면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포착했다. 어떤 그림은 푸른빛이 돌고, 어떤 그림은 장밋빛이며, 또 어떤 그림은 금빛으로 빛난다. 대성당의 형태는 거의 녹아내릴 듯 흐릿하다. 모네에게 중요한 것은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빛이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키는가였다. 1895년 전시회에서 이 연작을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감동했고, 어떤 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심지어 세잔은 "모네는 눈에 불과하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라고 평했다. 칭찬인지 비판인지 애매한 말이었지만, 모네의 시각적 천재성을 인정한 것은 분명했다. 이후에도 연작은 계속되었다. 템스 강의 런던 풍경, 베네치아의 궁전들,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 모네는 집착에 가까운 열정으로 빛의 변화를 추적했다. 그에게 회화는 더 이상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빛 그 자체를 포착하는 것이었다. 수련 연못의 탄생 1893년, 모네는 자신의 정원에 인접한 땅을 추가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역 주민들은 반대했다. 이국적인 식물들이 지역 생태계를 해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네는 허가를 받아냈고, 일본식 정원을 조성했다. 에푸트 강의 지류를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었다. 일본식 목조 다리를 놓았고, 버드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등나무 덩굴이 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했다. 모네는 자신만의 동양적 낙원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가 있는 풍경을 그렸다. 1899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일본식 다리 연작들은 아직 전통적인 구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평선이 보이고, 다리가 중심을 이루며, 안정적인 구성이었다. 하지만 점차 모네의 시선은 물 표면으로 내려갔다. 연못 자체, 특히 수련과 물에 비친 하늘과 나무들. 이것이 모네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주제가 되었다. 수련 연작은 모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된 작업이었고, 총 250점 이상이 제작되었다. 말년의 고뇌와 승리 1900년대 들어서면서 모네는 명성의 정점에 있었다. 작품은 높은 가격에 팔렸고, 전 세계의 수집가들이 그의 그림을 원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련이 계속되었다. 1908년, 모네는 시력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지만, 점차 심각해졌다. 백내장이었다. 화가에게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모네는 공포에 빠졌다. 색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고, 팔레트에 색 이름을 적어두고 작업해야 했다. 1911년, 알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2년 후에는 장남 장마저 죽었다. 연이은 죽음으로 모네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친구들의 격려, 특히 정치가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조르주 클레망소의 설득으로 모네는 다시 붓을 들었다. 클레망소는 모네에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대형 수련 장식화를 그려 프랑스에 기증하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모네의 나이 일흔넷이었다. 전쟁의 소식은 모네를 슬프게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거대한 캔버스들을 작업하기 위해 새 스튜디오를 지었다. 2미터가 넘는 높이에 폭이 12미터가 넘는 캔버스들. 거의 벽화 크기였다. 모네는 이 거대한 작품들 앞에서 하루 종일 작업했다. 시력이 나빠져도, 관절염으로 손이 떨려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캔버스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완벽주의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1923년, 모네는 마침내 백내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두려웠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수술은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다시 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수술 후 모네의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외선 영역의 색들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오랑주리의 수련 모네는 대형 수련 장식화 작업을 계속했다. 프랑스 정부와 협상하여, 이 작품들을 오랑주리 미술관의 특별한 타원형 방에 영구 설치하기로 했다. 모네의 요구사항은 까다로웠다. 자연광이 들어와야 하고, 작품들이 벽 전체를 감싸야 하며, 관람객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 작품들은 모네의 이전 작업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수평선이 없었다. 하늘과 물의 경계가 모호했다. 수련과 구름, 나뭇가지의 반영이 뒤섞여 추상에 가까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어떤 부분은 거의 추상표현주의를 예고하는 듯했다. 1926년 12월 5일, 모네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든여섯 살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화가였던 것이다.
아트스토리 · 2025.12.21 | view.23
구스타프 클림트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 소더비서 3,300억 원 역대급 낙찰
현대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 경신… 다빈치 ‘살바토르 문디’에 이어 역대 2위 기록(뉴욕=소더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걸작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Portrait of Elisabeth Lederer)>이 전 세계 미술 시장을 뒤흔들었다.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뉴욕 소더비 본사에서 열린 저녁 경매에서 이 작품은 2억 3,640만 달러(한화 약 3,300억 원)에 낙찰되며 현대 미술(Modern Art) 경매 역사를 다시 썼다. 이번 낙찰가는 2022년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약 1억 9,500만 달러)이 세운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은 것으로, 전체 미술품 경매 역사를 통틀어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4억 5,030만 달러)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20분의 숨 막히는 경합, 그리고 신기록 소더비의 새로운 본사 브로이어 빌딩(Breuer Building)에서 열린 이번 경매는 시작부터 뜨거웠다. 에스티 로더 가문의 상속자이자 저명한 컬렉터였던 故 레너드 로더(Leonard A. Lauder)의 소장품으로 나온 이 작품은 예상가 1억 5천만 달러를 훌쩍 넘기며 시작되었다. 현장에서는 약 20분간 6명의 입찰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며, 가격이 2억 달러를 돌파하는 순간 장내에는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종 낙찰자는 전화 응찰자로 알려졌으며, 소더비 측은 구체적인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다.격동의 역사를 견뎌낸 ‘빈의 모나리자’1914년부터 1916년 사이에 완성된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은 클림트의 ‘황금기’ 스타일과 후기 스타일이 절묘하게 조화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림 속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레더러는 당시 빈의 부유한 산업가 오거스트 레더러의 딸로, 클림트가 가장 아꼈던 후원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 작품은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드라마틱한 역사적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레더러 가문의 컬렉션은 몰수당했으나, 이 작품만큼은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했다. 클림트의 다른 주요 작품들이 1945년 임멘도르프 성 화재로 소실된 것과 달리, 전쟁의 참화를 견뎌내고 원소유주 가문에게 반환된 몇 안 되는 대형 초상화 중 하나다.“돈으로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미술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기록적인 낙찰가가 ‘희소성’에서 기인했다고 분석한다. 헬레나 뉴먼 소더비 유럽 회장은 경매 직후 인터뷰에서 “클림트의 전성기 대형 초상화는 대부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시장에 나올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걸작이라는 점이 컬렉터들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평했다.특히 그림 속 엘리자베스가 착용한 우아한 흰색 의상과 배경에 묘사된 동양적인 청색 톤의 조화는 클림트 특유의 장식성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이번 경매 결과로 구스타프 클림트는 명실상부한 ‘가장 비싼 현대 미술가’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으며, 세계 미술 시장은 2025년 연말을 뜨겁게 달군 ‘클림트 열풍’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아트뉴스 · 2025.12.21 | view.18
트렌드가 아닌 태도로서의 인테리어
요즘 인테리어를 이야기할 때, 예전처럼 “어떤 스타일이 유행이에요?”라는 질문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대신 이런 질문이 더 자주 등장합니다. “이 공간에서 오래 살아도 괜찮을까요?” “지금의 내 삶에 이 인테리어가 맞을까요?” 2025년을 관통하는 인테리어 트렌드는 바로 이 질문들에서 출발합니다. 트렌드는 더 이상 외부에서 내려오는 규칙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 방식과 감정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끌어올려진 결과가 되었습니다.공간은 이제 ‘보여지는 것’보다 ‘머무르는 것’이 되었다.과거의 인테리어가 사진 속 완성도를 중시했다면, 지금의 인테리어는 체류 시간을 기준으로 평가받습니다. SNS에 올렸을 때 얼마나 반응이 좋은가보다, 하루의 끝에서 그 공간이 나를 얼마나 잘 받아주는지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최근 공간들은 유난히 조용하고, 톤은 낮아졌으며, 대비는 완만해졌습니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웰니스(wellness)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웰니스는 특정 기능이나 콘셉트가 아닙니다. ‘요가하는 집’, ‘명상하는 집’ 같은 표면적인 설정이 아니라, 공간 전체가 사용자에게 주는 심리적 안전감을 의미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색의 밀도, 바닥을 밟았을 때 느껴지는 감촉, 소리가 울리는 방식까지. 잘 설계된 공간은 사용자가 의식하기도 전에 몸부터 반응합니다. 특히 조명은 그 핵심 요소입니다. 요즘 인테리어에서 조명은 더 이상 단순한 밝기 조절 장치가 아닙니다. 아침에는 자연광에 가까운 색온도로 하루의 리듬을 깨우고, 밤에는 눈과 신경을 자극하지 않는 웜톤으로 서서히 공간을 가라앉힙니다. 이 조명의 흐름이 잘 설계된 공간은, 별다른 연출 없이도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줍니다.자연을 닮은 공간, 그러나 자연을 흉내 내지는 않는다.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바이오필릭 디자인(Biophilic Design)은 이제 하나의 트렌드를 넘어 기본 전제가 되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변화는,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는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내 정원을 만들거나 식물을 과시적으로 배치하기보다는, 자연이 가진 속성을 공간에 번역하는 방식이 주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완전히 균일한 흰 벽보다는, 미세한 입자가 느껴지는 페인트 마감이 선호됩니다. 매끈하게 코팅된 표면보다, 손으로 만졌을 때 온도와 질감이 전해지는 소재들이 선택됩니다. 나무 역시 지나치게 가공된 형태보다는 결이 살아 있고, 약간의 불규칙함이 남아 있는 상태가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는 단순한 미적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에 대한 집단적 학습에 가깝습니다. 컬러는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이 된다.2025년 인테리어 컬러 트렌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색은 말하지 않고, 분위기만 남긴다.”강렬한 컬러로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던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베이지, 샌드, 웜 그레이, 그레이시 그린처럼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색들이 공간의 기본값이 됩니다. 이 색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오래 봐도 피로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포인트 컬러의 사용 방식입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포인트는 면이 아니라 점이나 리듬으로 등장합니다. 쿠션 하나, 액자 하나, 작은 오브제 하나. 이 작은 색의 변화가 공간 전체의 인상을 좌우합니다. 이는 인테리어가 점점 더 편집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지속 가능성은 윤리가 아니라 ‘안목’이 되었다.친환경,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공간에 녹여내느냐입니다. 요즘 인테리어에서 지속 가능성은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공간을 보는 눈의 깊이로 인식됩니다. 오래 쓸 수 있는 디자인인지, 시간이 지나도 촌스러워지지 않는지, 수리하거나 재사용할 여지가 있는지. 이런 질문들이 디자인 선택의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최근 공간에서는 유행을 강하게 타는 가구보다, 형태가 단순하고 비례가 좋은 가구들이 선호됩니다. 한눈에 화려하진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물건들입니다.공간은 하나의 역할만 수행하지 않는다.재택근무와 유연한 라이프스타일이 일상이 되면서, 공간의 기능은 빠르게 중첩되고 있습니다. 거실은 휴식 공간이자 업무 공간이고, 식탁은 식사와 작업을 동시에 담당합니다. 그래서 최근 인테리어에서는 벽을 세워 기능을 구분하기보다는, 가구 배치와 조명, 소재의 변화로 공간의 성격을 나눕니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공간에서는 완벽한 분리보다 전환의 부드러움이 중요합니다. 낮에는 집중할 수 있고, 밤에는 긴장이 풀리는 구조. 인테리어는 이제 고정된 사용법을 제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주될 수 있는 여지를 남깁니다.기술은 배경으로 물러난다.스마트홈 기술은 이미 충분히 보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의 관심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연스럽게 작동하는가’입니다. 버튼과 디스플레이가 눈에 띄는 공간보다는, 기술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히 작동하는 공간이 더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습니다. 좋은 기술 인테리어란, 사용자가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명이 자동으로 조절되고, 온도와 습도가 자연스럽게 유지되며, 공간이 사용자보다 먼저 반응하는 상태. 기술은 앞에 나서지 않고, 삶을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결국 인테리어는 ‘삶의 태도’를 드러낸다.2025년의 인테리어 트렌드는 하나의 스타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대신 분명한 공통점은 있습니다. 더 느리게, 더 솔직하게,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인테리어는 취향을 과시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좋은 공간일수록 말이 없습니다. 다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조금 더 편안해지고,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워질 뿐입니다. 요즘 인테리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트렌드는,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공간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공간 안에서 자신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
인테리어 · 2025.12.21 | view.25
